자전적 에세이

신혼없이 4명의 중학생 사내아이 돌보기: 영국에서 결혼하자 마자 생긴 보호자 역할

영국해방이 2023. 8. 31. 06:12

결혼하면서, 나는 그 달콤한 신혼 생활의 꿈을 그렸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시작됐다.

 

남편 루누을 만나고 깊은 사랑에 빠져 헤어지기를 원치 않아 결혼을 결심했다. 루누, 그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의 눈빛에서 느껴진 진심은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 본 그 다음 날 나이트클럽에 혼자 놀러 와서 나를 찾았고 나를 보고 난 후 내게 마실 것을 사주면서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다. 남편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Ringwood의 한 인도 식당 요리사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식당일이 밤 12시가 지나서야 끝나는데도 매일밤 그는 나를 만나러 왔다. 그의 눈동자는 항상 나를 향했다. 그 정성에 저절로 내 마음도 그를 향해 갔다. 남편은 정말 착하고 자상했다. 이런 남자여서 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과의 결혼을 밀어붙였다. 

 

우리는 두 가정의 반대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양쪽 부모와 형제가 참석하지 않은 친구 몇 명을 초대해서 Registry Office에서 예쁘게 차려입은 한복과 몇몇 친구들 앞에서 작지만 의미 깊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 순간, 우린 서로만의 세계에서 행복했다. 우리 집에선 남편의 국적과 피부 때문에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고, 시댁에선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기 보단, 시어머니가 본인 큰 아들과 큰 딸에게 외국인 며느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을 꺼려해서, 나의 존재를 알리지 않아 다른 시동생들도 아무도 우리의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그런데 내 큰언니는 남편의 피부와 국적은 싫었지만, 남편과 결혼하는 내가 싫진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당장 아들 둘을 내가 사는 영국에 보내고 싶어 했다. 생활비에 보탬이 될 것이라면서 조카 둘과 언니친구 아들 둘 총 4명을 보내겠다는 제안으로 4명의 사내아이들과 생활이 시작됐다. 가족이 보고 싶거나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을 텐데 애들이랑 생활하면 이런 외로움도 없을 것 같아서 흔쾌히 보내라고 했다. 애들 영어 때문에 영국에 보냈는데 대부분이 영어학원에나 다니다가 사립학교를 가든 아님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는 내가 보호자가 되어 애들을 공립학교에 보낼 수 있게 돼서 4명이 2년 정도를 영국 공립 중학교를 다니게 됐다. 큰 조카 성진이와 성진이와 동갑이었던 선후가 중학교 2학년 과정으로 그리도 둘째 조카 영진이와 선후 동생 재현이는 1학년 과정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영어를 배우게 해달라"는 부탁 아래, 나는 한국에서 보습학원을 했던 경험으로 선생님의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애들이 학교에 다녀오면, 숙제 검사, 또는 단어 공부를 시켰다. 음식이야 거의 남편이 요리해서 애들을 챙겼다. 주말에는 영국의 여러 명소를 다녔고, 런던 시댁도 자주 방문했다. 

 

그런데, 애들이 영국와서 모든 게 낯설어겠지만 이모랑 이모부가 있어서 든든했고 좋았는데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집에 있을 때는 재밌어하는 것 같는데 학교에 갔다 오면 풀이 죽어있거나 하는 것이었다. 언어의 장벽때문에 영국 학교에서의 일상이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특히나, 큰 조카 성진이가 많이 힘들어했었다. 하루는 성진이가 학교를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일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애들이 자기가 못생긴 동양 남자에 영어도 못한다고 놀린다는 것이다. 성진이가 원래 쾌활하고 자존심이 세고 자신감 넘치는 아이였는데 영어라는 언어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기가 죽은 것이었다. 내 조카가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들으니 정말 화가 났지만, 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영어도 잘 못할 때였으니..

 

성진이가 당했다는 인종차별을 학교에 가서 상담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남편에 물으니 상담보단 애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며 성진이에게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편 역시 어릴 때 영국에 와서 겪었던 심한 인종차별의 슬픔을 알고 있어서 성진이나 다른 애들의 고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남편은 성진이와 3명의 사내아이들을 위해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줬다. 매일 몇 시간씩 어떻게 방어를 하고, 언제 훅을 날려 상대방을 눕힐 수 있는지 가르쳐주니 얼마동안 잘 배우더니, 하루는 성진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아주 해맑은 얼굴로 '이모, 나 오늘 영국애 한 명 때려눕혔어! 나를 괴롭힌 놈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나를 때리려고 했는데, 내가 방어를 아주 잘해서 한대도 안 맞고 훅을 날려서 때렸는데 그냥 그놈 쓰러졌어" 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학교에 이 일이 알려져 그 누구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단다. 성진이는 학교에서도 다시 자신감을 찾게 되었다.

 

나 역시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감정과 경험을 떠올려보면, 영국 문화도 언어도 서툴고 모든 게 부족한 때라 현지인 남편을 많이 의지하고 있어서 남편에게 성진이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 보습학원을 하면서 영어를 가르친 경험에 한국인들이 내가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의 영어는 한참 부족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인 남자친구가 생겼고, 남편을 만나서 이 두 남자 덕분에 인종차별이라든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 같이 어울렀던 한국여자아이가 길거리에서 어린 영국남자아이로부터 침을 뱉어 얼굴에 던진 사건이나 대낮에 마약을 했는지 술에 취했는지 모르는 백인 여자한테 다른 한국 여자애가 엄청 심하게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나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나진 않았다. 특히나 남편은 나를 엄청 보호해 줬기에 난 괜찮았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어린 나이에 겪으면서 이 4명의 아이들은 사춘기를 그렇게 보낸 것 같다. 나도 이 4명의 사내애들과 지낸 2년 동안 참 행복했다. 딸을 임신하고 있던 상태여서 가끔은 힘들었지만 애들이랑 함께 한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큰 형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큰언니는 내게 전화를 해, 애들에겐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애들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다고. 한국에 들어오면 자기가 말하겠다면서. 난 알겠다고 했다. 애들한테는 미안했지만, 애들 엄마가 애들이 영국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고 영어공부에만 전념하기를 원한다고 하니, 애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조카 둘은 큰 형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2달 후에 한국에 돌아갔다. 나머지 2명도 3개월 지나고 돌아갔다. 큰 형부가 잠깐 영국에 애들이 보고 싶어서 선후 재현이 부모님이랑 오신 적이 있었는데, 이때가 애들을 마지막으로 보고 가신 것이다. 애들이 영국 학교를 더 오래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고맙다고 하셨었는데...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간 뒤, 우리 집은 조용해졌다. 갑자기 4명의 애들이 빠지니 허전하기도 했지만, 딸이 태어났고, 딸을 키우면서 또 바쁜 나날들로 그리움을 뒤로하고 매일매일을 또 그렇게 바쁘게 보냈다. 이제는 진짜 엄마가 되어 딸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